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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유감

에세이 마당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1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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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새벽부터 벌초 준비물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식수 두 병과 쟁반 하나에 포도 한 봉지를 담아 배낭에 넣는다. 긴 팔로 된 티셔츠를 입고 등산화에 모자까지 쓰고 집을 나선다.

해마다 이맘때면 넘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벌초다. 아마 중학교 시절부터 따라다녔으니 벌초 이력만 해도 40년이 넘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대학교 2학년 이후로는 6촌 형님과 거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벌초를 다녔으니 벌초 전문가라 해도 무방하리라. 증조부 산소부터 선친까지 일곱 기가 있고 묘사 지내는 윗대 산소도 여섯 기가 있으니 해마다 벌초할 때가 되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래도 산소가 모두 대구 인근에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아주 높은 산등성이에 산재한 몇몇 산소는 어른들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찾아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이제는 봉분의 흔적조차 찾기가 힘드니 후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회한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도원 저수지를 경계로 왼쪽 보훈병원 옆에 선산이 있고 오른쪽은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강제로 공동묘지에 모신 두 기가 있어 등산하다시피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월광수변공원에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저수지 입구에서부터 먼 길을 올라가야 했다. 예초기가 생기고부터 노동이 훨씬 줄어들기는 했지만 갈고리로 낙엽이나 솔가리를 긁어모으는 일도 그리 수월하지는 않다. 한나절 굵은 땀을 흘려야 마무리가 된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그래도 조상의 산소를 돌보는 일이 내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다.

수변공원에서 제법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나온다. 도원초에서 시작하는 등산로와 만나 저 멀리 삼필봉까지 이어지는 길이라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소나무 아래 긴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고 나서 산소로 향한다. 지난해에 묵혀서인지 잡풀이 잔뜩 우거져 있다. 산소 주변에 산재한 어린 참나무들을 정리하고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들을 다듬고 나니 내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 같다. 산 아래 수밭 마을을 내려다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산을 내려와 선산으로 향한다.

보훈병원 옆에 자리한 선산에는 증조부 밑으로 다섯 기를 모시고 있다. 다행히 한 곳에 모신 윗대 산소들은 일가 후손들이 따로 날짜를 정해 함께 모여 벌초를 한다. 그 중간 대의 몇몇 산소는 거의 청룡산 정상 가까이 있어 벌초를 할 수가 없다. 그 옛날 나지막하던 소나무들이 이제는 장송이 되어 산소를 뒤덮고 있으니 무성하던 잔디가 거의 없어졌다. 울창한 수풀에 쌓여 일조량이 부족한 탓이리라. 도로에서 가장 가까이 모신 선친 산소에는 잔디가 너무 없어 부끄러움이 앞선다. 봉분 주변에 울창한 참나무 숲이 잔디를 없애는 주범이지만 달리 해결책이 없다. 그래도 작년에 새로 잔디를 입히고 매월 꾸준히 잡초를 뽑아 준 뒤부터는 제법 띠가 살아 있어 마음이 놓인다. 

벌초하다가 벌어진 일화들도 많다. 예전 증조부 산소에는 잔디가 무성해서 낫으로 베다가 서툰 솜씨에 손가락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읍내 병원 응급실에서 몇 바늘 꿰매기까지 했으니 조상 모시는 정성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또 한 번은 6촌 동생과 둘이서 열심히 벌초를 하고 집에 왔는데 다음날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초하러 간다더니 왜 그냥 왔나?”

“벌초 다 하고 왔는데요.”

“아니, 어디 가서 벌초했는데?”

그제야 무언가 사태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랴부랴 선산에 가보니 엉뚱한 산소에 벌초를 하고 온 것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산소가 비슷했던 탓에 남의 벌초를 대신한 셈이 되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는 증조부 산소에 가 보니 벌써 누가 깨끗하게 벌초를 해 놓기도 했다.

6촌 형님과 함께 한 지난 40년의 벌초는 내 삶의 행적이 아닐 수 없다. 벌초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조상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다가올 성묘나 묘사를 대비하는 의례적인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치르는 일이지만 마음가짐은 늘 조심스럽다. 요즘 세대에서는 벌초 대행이니 뭐니 해서 맡겨 버리기도 하지만, 나는 내게 남은 여생이 다할 때까지 산을 오르며 갈고리를 놓지 않을 것이다. 조상을 섬기는 마음은 곧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풀 한 포기를 베거나 자갈돌 하나를 빼면서도 내 마음을 닦듯 산소를 다듬는다.

근본을 찾아 올라가면 시조가 되시는 환성군으로부터 26세손이신 성산군에서 본관을 성주로 갖게 된 이후 현재 45세손인 내게는 조상님 모두가 내 삶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 수없이 드나들었던 원덕 마을이 아파트 숲으로 바뀌고, 월배읍에서 들어오던 자갈길이 포장도로가 되었지만, 오늘도 나는 선산에 올라 벌초를 하며 가까이로는 선친으로부터 멀리 9대조 할아버지까지 만나고 오는 것이다.

온갖 잡풀을 베고 주변을 정리하고 선산을 내려와 새로 개통된 앞산 터널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 한결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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