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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로 가는 길

에세이 마당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2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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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떠나는 산행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기운을 활짝 펴고 대자연의 맑은 공기 속으로 훌쩍 떠나는 기분이 너무 좋다. 희뿌연 밤안개가 걷히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니 상쾌한 강바람이 코를 희롱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도 봄기운이 감돌아 훈훈하다. 달마가 동쪽으로 와서 머물렀다는 전설이 담긴 달마산이 오늘 산행의 목적지다.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며 한반도 최남단에 우뚝 서 있는 바위산이다.

집결지로 가는 시내버스 차창으로 봄날의 아스라한 향기가 스며든다. 길가의 나무들도 나를 배웅하듯 바람에 날리며 손을 흔든다. 시내가 온통 등산객을 기다리는 버스로 붐빈다. 날이 풀리니 저마다 산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이렇게나 많은 등산객이 어디 숨어 있었단 말인가? 알록달록 미모를 뽐내며 다들 산악회를 찾아 버스에 오른다. 안개 낀 도시를 뒤로 하고 차가 움직이면 달마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반갑게 일행을 맞는다. 기다리던 정토 산행의 첫걸음이다.

산행은 언제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린 시절 김밥 싸 놓고 기다리던 소풍이 밤잠을 설치게 하듯 자연과의 만남은 늘 우리를 새색시로 만든다. 서너 시간 눈 붙이고 나온 몸이 땅끝 해남을 간다는 즐거움에 들뜨기만 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맞이한 눈발이 하늘의 선물인양 흐드러지고,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운무가 천사의 축복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산행의 묘미가 아닌가. 산은 늘 거기에 있고 우리는 산으로 나를 찾아 나선다.

갑자기 차 안이 숙연해진다.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법회가 시작된다. 열반에 이르는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삼학의 첫 단계인 계행(戒行)을 다지는 염불 소리가 울려 퍼지니 불심이 절로 일어난다. 낭랑하게 읊조리는 반야심경 구절이 흐려진 심안을 밝히는 등불 같다. 산사에서의 고요한 분위기가 아니라도 마음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색다른 차 중 법회로 달마로 가는 길이 피안에 이르는 여정이 된다.

도시를 떠난 버스는 따사로운 봄날에 묻혀 해남을 향해 달린다. 봄의 전령사가 온 산하를 누비는 듯 파릇한 숲들이 차창에 펼쳐진다. 밭고랑에서 올라오는 생명의 숨소리가 차 안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저 멀리 섬진강은 봄을 재촉하듯 잰걸음으로 굽이지며 달려가고, 계절의 여왕을 맞으러 땅 속부터 하늘까지 대자연은 온통 춤을 추듯 흐느적거린다. 때 늦은 꽃샘추위도 절기를 속이진 못하리라. 춘분이 코앞이라 불가에서 일컫는 봄의 피안이라 하니 모두가 극락왕생하는 은혜를 입는다.

아침을 맞은 휴게소도 붐비기는 마찬가지다. 버스로 가득 찬 주차장 가운데 그냥 서서 아침을 먹는다. 국 하나에 김치뿐이지만 꿀맛이다. 옹기종기 모여 산행에 앞서 기운을 다지는 등산객들의 활기찬 모습에 꽃샘바람도 슬며시 비켜간다. 춘삼월 호시절이란 옛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상춘을 즐기려는 풍류객들로 화장실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해마다 급증하는 산행객으로 용품점이 불경기에도 호황을 누린다니 태평성대가 따로 없다.

시끌벅적한 휴게소를 떠나 남도 팔백 리를 달려 달마산 입구에 다다르니, 저 멀리 산봉우리가 반갑게 우리를 맞는다. 길 가에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정겹게 들리고 숲 속에는 춘란 한 포기가 새초롬하게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낸다. 알싸한 봄 냄새가 풍겨 나는 오솔길을 지나 산 밑에 이르니 크고 작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해풍에 시달린 암벽을 타고 허겁지겁 오르니 또 다른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완도가 크고 작은 섬들과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있다. 다도해의 절경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산등성에 올라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멀리 남해를 조망하니 극락이 따로 없을 듯하다. 가파른 절벽을 오르느라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마음은 저 멀리 수평선을 날아오른다. 능선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널따란 억새밭에 이르니 시장기가 감돈다. 저마다 차려온 소찬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달마봉을 향해 다시금 산을 오른다. 안개비가 차츰 굵어지더니 제법 빗방울이 듣는다. 비바람 막아주는 겉옷으로 갈아입고 발길을 재촉하니, 그 옛날 봉화대가 있어 불선봉이라고도 불리는 산꼭대기가 바로 지척이다.

드디어 정상에 오르니 단출한 돌탑이 하늘로 솟아 있다. 삐뚤삐뚤 모양은 어설프지만 돌멩이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모진 해풍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소망으로 서 있는 돌탑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다. 정상에 오르면 주역에 나오는 중건천(重乾天의) 상양(上陽)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다 이루고 가득 차면 기울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꼭대기에 올랐으니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걸 우리 모두가 깨닫는다면 세상은 훨씬 더 밝아지지 않을까?

빗방울이 점점 잦아진다. 암벽으로 내려갈 일이 걱정이다. 미황사로 가는 내리막길은 빗물에 젖어 미끈거린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고 한다. 기묘한 바위들이 손짓해 불러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가까스로 급경사를 벗어나 한숨 돌리니 새빨간 동백꽃이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화사한 동백에 취해 잠시나마 몸을 다독이며, 동백이 주는 신중함과 겸손함을 배우며 매사에 허세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새롭게 다진다.

우중이라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한 미황사를 뒤로 하고 바쁜 걸음으로 차에 오르니 밀렸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남도 팔백 리 길을 되돌아오며 몸은 지쳐도 마음만은 피안에 이른 듯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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