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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드라마

비평과 후기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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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한 드라마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힐링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시청률이 거의 50%에 육박하면서 소위 국민 드라마가 되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드라마의 희비에 울고 웃었다. 바로 주말 드라마 ‘내 딸 서영이’가 그 주인공이다. 마지막 우여곡절을 일구어 내며 종방을 맞이한 이 드라마가 내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의 원천이 된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한다. 그 연극 같은 인생을 담아 놓은 게 드라마가 아닌가. 우리 삶 자체가 연극이자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다시 내 삶을 비추어 보기도 한다. 최근에 영화 ‘레미제라블’이 큰 성황을 이루며 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린 것처럼 드라마도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실의에 젖은 관객들은 사회적 부조리에 항거하는 민중의 모습을 통해 용기를 되찾는다. 한 편의 드라마 속에서 울고 웃는 사이에 나 또한 삶의 변화를 통해 깨어나기도 한다.

‘내 딸 서영이’는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부녀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는 가족 드라마라고만 할 수도 없다. 드라마의 캐릭터가 살아 있고 변화하는 입체성을 보여 준다.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인물의 변화에서 이 드라마는 상당한 감동을 자아낸다.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틀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 변모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힘이 바로 이 드라마의 인기와 힐링의 강도를 더해 준다.

출생의 비밀이나 복잡한 내연 관계 등으로 범벅된 극적 메커니즘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도 나타나 있을 만큼 고금을 초월하여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시청률에 밀려 다각 관계와 출생의 비밀, 얽히고설킨 우연성 등의 구성에만 의존한다면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물의 역동성은 드라마의 감동 지수를 높여주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내가 간절히 사랑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상대가 원하는 시기에, 상대가 원하는 것을 행해주는 것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한다. 맹목적 헌신이 최상의 방식이 될 수 없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게 곧 나를 위함이라는 감춰진 진실이 늘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버림받아 회환의 눈물을 흘릴 때, 과연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참사랑의 구현은 그만큼 미묘하고 복합적이다.

‘내 딸 서영이’에서도 갈등은 증폭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부부 사이의 갈등, 자식들 간의 갈등이 초반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모녀의 헌신적 노력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 아버지의 이탈은 결국 서영이로 하여금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게 만든다. 두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부간 불협화음은 남편이나 아내의 자기중심적인 경직성과 몰이해성이 빚어내는 갈등이다. 비교적 사소한 자식들 간의 갈등이 양념을 더하면서 드라마는 중반을 넘어선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의 변모가 주목할 만하다. 서영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인자함에서 가족을 내팽개친 비정함에 빠졌다가 다시 회환을 거치는 아버지로 거듭난다. 서영 자신도 한 꺼풀씩 내면의 고통을 벗겨내면서 제자리를 찾아온다. 여타 인물들의 자기 극복 과정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인물들의 성격 변화와 구성의 치밀함으로 인해 막연한 억지춘향식 해결이 보이지 않아 드라마의 완성도가 더 높은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감동을 주는 인물은 서영의 남편이었던 우재다. 그는 사랑의 참모습을 연기로 보여주는 시대의 로맨티시스트이다. 초반에는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의 사랑으로 서영과 결혼하게 된다. 그 사랑의 진성성이 컸기에 서영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기는 했지만 끝내 서영의 비밀을 풀어내지는 못해 헤어지고 만다. 우재가 자신을 극복해가며 변모하는 모습은 마치 성자의 후광을 보는 듯하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철저하게 서영을 위한 서영의 방식에 따른 사랑의 실천이기에 해피엔딩의 당연한 귀결로 이어졌다.

내게는 이러한 우재의 변모가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어떤 선택도 자신을 포기하고 서영의 의중에 맡긴다.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는 데서 사랑의 씨앗이 싹튼다. 헤어지자면 헤어지고, 만나자면 다시 만나고, 눈 앞에서 사라지라면 말없이 사라진다. 아마 이런 경지에 빠져 있다면 나도 집에서는 성자로 거듭나지 않을까.

초기불교에서 버려야 할 10가지 족쇄 중의 첫 번째가 유신견(有身見)이라 한다. 가장 낮은 성자인 수다원(예류자)은 이 유신견을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버리는 것이야 말로 상대방의 방식에 따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기에 구현해 주는 진정한 사랑의 성자가 되는 유일무이한 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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