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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삶 - 나의 습작시 모음

수필 쓰기

by 전하진(全夏辰) 2020. 9. 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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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공자께서 시경에 이르시길 '詩三百 (시삼백) 一言以蔽之 (일언이폐지) 曰思無邪 (왈사무사)'라고 하셨는데, 이는 시의 내용에 대한 언급으로 시의 주제가 되는 시인의 생각과 느낌의 순수함을 피력한 것으로 이야기와는 다른 시의 본질적 특성인 자기 고백이나 외부 세계의 순수한 자아화 과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다르게 서양의 시에 대한 개념은 형식적 측면에 치우쳐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표상인 현실의 모방이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시도 마찬가지로 이중 모방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를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에서 재현으로의 의미 전환을 가져오면서 시에 대한 비판보다는 시의 효용에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주장함으로써 시와 예술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고 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시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Il Postino'에서는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아마도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세상의 시인 수만큼 많은 개념들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시를 쓰거나 읽으려면 적어도 시가 무엇인지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시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생각과 느낌을 사회적 표상의 하나인 언어를 통해 가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예술 활동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순수한 생각과 느낌을 적절한 언어 표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닌가 한다.


고향 

 

 

산 굽이 물 굽이 수곡 이십 리

우뚝 선 아기산 가을을 손짓하고

노오란 은행잎 나비처럼 흩날리네

 

잊으려 잊으려 고향을 떠나 가도

날마다 떠오르는 추억의 징검다리

이제는 기억 속에 묻혀 버린 풍경화

 

챗거리 말굽 소리 들릴 듯 말 듯

한들 큰골엔 푸른 돛단배

길고 긴 새 다리 옛정을 싣고 간다

 

 1992년 11월 임동에서 - 임하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어 새 이주지로 옮긴 사람들과 멀리 떠난 수곡리 주민들을 생각하면 지은 시조.


들꽃 

 

 

나는 한 송이 들꽃

이름 모를 들과 산에

그저 피어나는 들꽃

향기도 몸짓도 없이

푸른 하늘 벗 삼아

흙과 같이 살고 싶네

내가 너의 무엇이 되고

네가 나의 의미가 되면

들꽃은 사라지고

소쩍새 붉은 울음

진달래꽃 피어난다

 

두견화 피고 지면

내 다시 들꽃이 되어

너를 위해 소리 없는

향기를 피우리라

 

1993년 11월 임동에서 - 인간사의 허망함을 생각하며 인간 사이의 관계 설정의 어려움을 토로한 시.


가을 

 

 

푸른 나뭇잎 

가슴에 남아

봄은 아직  언덕 너머

떠다니는데

노란 은행잎

어느새

늙은 나그네의 뒷모습처럼

자리 잡는다.

삶은 여물고

할 일은 많아

해는 아직 서산에 있고

새벽 서리는

겨울의 흰 눈 기약하는데

바쁜 발걸음 

제자리 맴돌면

길거리에 남는 건

수북한 낙엽 더미뿐

 

1995년 10월 안동에서 - 계절의 바뀜에 따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쓴 시. 


강물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

깊은 울음 삼키고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네

 

이제 강둑이 터져

갈 길 잃은 소용돌이

온 들을 헤매네

강물은 제 뜻대로

흐르지 않고

생긴 대로 낮은 데로

흐르는 어머니

한 줄기 강물은

달빛에 일렁이는

아녀자의 속눈썹

강은 그저 말없이

흐를 뿐이네

 

# 1998년 6월 안동에서 -  용상동을 휘돌아 흐르는 반변천을 보며 유구한 낙동강의 물줄기를 노래하며 강물이 지닌 깊은 모성애를 드러내고 있는 시.


풀잎 

 

 

하늘거리는 아지랑이

발밑을 간지럽히고

철없는 나비 흔들어대면

나는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

 

따가운 뙤약볕 아래

무섭도록 짙푸른 녹음이 덮치면

나는 가쁜 숨 헐떡이며

활개를 펴고 일어선다

 

불현듯 찾아든 된서리에

가슴은 누렇게 멍들어

몸과 마음 안으로 삭히며

광활한 대지의 품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난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설국의 끝자락에 서면

가만히 껍데기를 벗기며

꿈결처럼 밀려오는 

동면에 빠진다

 

# 2017년 7월 - 하찮게 보이는 풀잎이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변모하는 모습을 노래한 시.


안개 

 

 

안개 자욱한 날에는

세상 한가운데 나 홀로

내 이름 지우며

저 멀리 복숭아밭을 거닌다

 

몽실몽실 꽃 피우는

물빛 새벽 안개가

내 발 밑에서 하나 둘 사라지면

나는 또다시 이름을 지운다

 

검은 얼룩이 사방에 퍼져

세상이 온통 까맣게 물들어도

산 허리 휘감은 안개에

마을은 이어 붙인 조각보 같은

설국이 된다

 

안개 휘돌아 감기는

잊혀진 새벽 숲길에 서서

나는 오늘도 내 이름을 지운다

 

# 2017년 8월 - 산을 오르다 맞은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며 세상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리는 안개의 신비함을 노래한 시.


석등 

 

 

팔각의 모서리

외발 하나로

활짝 피어나는 돌꽃

천년을 살다가는 

어둠의 저승사자

 

온몸으로 깨우친 경전

탑 속에 묻어두고

내 마음에 불 밝히는 

조그만 석등 하나

풍경 소리에 귀 열어

흰 달빛 아래 잠든다

 

# 2018년 9월 - 수필 [석등과 가로등]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절을 밝혔던 석등의 전설을 노래한 시.


물벼락 

 

 

아버지는 물벼락이다

오뉴월 더위를 깨는 따가움이

등줄기를 타고 목 안으로 차고 들어온다

문짝이 부서지는 다툼 끝에

마당에 엎드린 우리 등 위로

폭포수 한 줄기 매로 떨어진다

차마 손대지 못해

꽃 같은 아이들

어디 흠이나 날까 봐

애꿎은 물 한 바가지

허공 속에 흩어진다

빈 하늘 가르는 물벼락은

내 등을 적시는 따사로운 손길이다

 

# 2018년 12월 - 수필 [아버지와 물벼락]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자식을 아끼는 무한한 부성애를 노래한 시.


세월 

 

 

오래된 백일 사진

어느새 회갑연 열린다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없이

초롱한 눈망울

잔치상에 머문다

 

한 마당 꿈이 

독사 혓바닥 날름거리듯

속절없이 꺼지고

빛바랜 사진 

멍든 가슴에 품고

길 잃은 나그네마냥

벌판을 헤맨다

 

잃어버린 조각들

뿔뿔이 흩어져

까만 숯덩이로 남아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오늘 하루 스쳐 지나간다

 

# 2019년 2월 - 수필 [세월의 흔적]에서 소재를 취해 한 사람의 일생과 하루의 의미를 노래한 시.


시와 삶

시를 쓰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시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시를 쓰는 것이 필요하다. 순수한 생각과 느낌의 언어적 재현이 시라고 한다면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삶과 진리에 대한 치열한 열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리와 허위 두 가지가 있는데 진리란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허위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삶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시가 훌륭한 시가 아닌가 한다.

거의 30여 년 전에 습작으로 쓴 시들은 교내 시화전 같은 데에 발표하기 위해 쓴 시들로 시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이다. 연전에 쓴 몇 편의 시들도 나름대로 시 공부를 하면서 수필과 연계하여 쓴 시들이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시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아직은 삶에 대한 치열함이 많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한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순수한 내면의 진리를 드러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시를 쓰는 것이다. 꾸미거나 허위를 드러내는 이야기와는 달리 진솔하게 나 자신의 생각 너머에 담겨 있는 어떤 참된 목소리를 시로 표현하고 싶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만물의 움직임에 내재하는 기운이나 도(道)를 언어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사물과 형상을 제대로 보고 현상과 추상의 내밀함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시다운 시가 나올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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