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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기

여행 이야기

by 전하진(全夏辰) 2020. 7. 2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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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는 뗄 수 없는 이웃 나라 중의 하나다.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통틀어 중국과 얽히지 않은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이니 중국은 그야말로 우리와는 형제처럼 가까운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한때는 사대로 인해 군신관계가 되기도 하고 전쟁을 치르며 적대국이 되기도 했지만 지정학적 관계로 인해 언제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굴릴 수밖에 없는 이웃이다.

중국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황하 유역에서 싹튼 문명이 중국 역사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 밝혀진 바로는 요하 유역의 홍산 문명이 이보다 몇 천 년 앞선다고 한다. 거의 기원전 8,000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홍산 문명의 주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나, 재야 사학자들 중에는 우리 고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동이족이 홍산 문명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대 왕조를 나열하면 보통 하-상(은)-주-춘추전국-진-한-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중화민국-중공으로 불린다. 물론 이 왕조 이전에도 삼황오제라 해서 복희씨, 신농씨, 헌원씨와 소호-전욱-제곡-당요-우순을 지칭하여 부르지만 이들은 신화시대의 전설상의 황제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실제로 고증이 되는 왕조는 상왕조부터인데 수도를 은허에 둔 탓에 은나라라고도 불린다. 

중국의 지배 민족인 한족은 황하 유역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전쟁과 이동으로 인해 현재 중국 인구의 91%를 점유하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민족이다. 물론 엄청난 넓이의 영토로 인해 지역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상당하지만 10%도 안 되는 소수 민족들과는 달리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인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최근 비공개로 연구한 유전자 분석 결과에 따르면 중국의 남방인과 북방인 간의 혈연적 차이가 한족과 일부 소수 민족의 차이보다 훨씬 큰 격차를 보였다고 한다. 사실 세계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13억이 단일 혈통으로 유지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서안의 진시황릉

[북경]

중국을 처음으로 다녀온 때는 2006년 7월로 생애 두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소시민으로 살아온 탓에 해외여행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맨 처음 해외로 나간 게 1997년 IMF가 오기 직전 교과연구회 차원에서 다녀온 미국 동부와 캐나다였으니 거의 50대에 들어서서 조금씩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셈이다. 마침 북경에 파견 나가 있던 동생이 있어서 가족들과 일주일 정도 다녀왔다. 북경의 대표적 관광지인 만리장성과 이화원, 용경협, 자금성 등을 둘러보았다. 북경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흐릿한 날씨와 무질서한 교통에다가 현지 음식들이 호감도를 낮추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15년 7월에 연수 차 들린 북경은 때 아닌 강설로 눈 덮인 만리장성을 밟아 보는 행운을 갖기도 했다. 북경은 13세기 원나라 시대부터 대도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하여 행정수도로 자리 잡았다. 그 후 명나라 초기에는 남경으로 잠시 수도를 옮겼다가 3대 황제부터는 북경이라는 새 이름을 붙이고 지금까지 중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북경의 자금성과 눈 덮힌 만리장성

[홍콩/마카오/심천]

2008년 1월에 두 번째로 중국을 방문한 데는 홍콩/마카오/심천이었다. 세 도시가 인접해 있어 한꺼번에 다녀오게 되었다. 지인들과 함께 다녀온 여행이라 일정에 맞추어 주요 관광지들을 돌아보았다. 홍콩은 19세기 중반 영국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아편전쟁을 치른 후 1898년 6월부터 1997년 6월까지 99년간 영국에게 영유권을 내주었다가 중국으로 다시 반환된 도시이다. 홍콩은 반환 이후에도 향후 50년간 일국양제를 유지하며 홍콩특별행정구로 선포되어 어느 정도는 자치적인 도시라 할 수 있다. 마카오도 홍콩과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들의 식민 시대에 16세기부터 마카오를 통해 교역해 오던 포르투갈에 의해 지배되었다가 1999년 12월에 반환되어 역시 마카오특별행정구로 지정되어 일국양제의 적용을 받고 있다.

마카오에는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문화로 인해 30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카지노와 함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심천은 1979년에 경제특구로 지정된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구 천만이 넘는 신흥도시이다. 홍콩과 마카오에 이어 중국에서 세 번째로 1인당 소득 수준이 높은 심천은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 정책의 최대 성공 모델이 될 정도로 급성장한 도시로 인접한 홍콩과의 합병설이 돌기도 한다. 

마카오의 성 바오르 성당의 잔재

[하문/무이산]

세 번째 중국 여행지는 2014년 1월에 다녀온 복건성 일대의 하문과 무이산이다. 복건성 제2의 도시인 하문은 1980년에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나로 지정되면서 서구 자본주의를 정착시킨 대표적 도시로 무이산 대홍포 철관음 차를 해외에 맨 먼저 알린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시가지가 있는 하문도는 육지와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고 해안에서 멀지 않은 금문도는 대만 영역인데 바로 코 앞에 보인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인구 2백만의 신도시 하문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가면 주희의 고향인 무이산이 나온다. 무이구곡의 절경을 래프팅으로 내려오는 체험이 압권이다.

무이산에서 바라본 무이구곡

복건성 최고의 관광은 토루 관람일 것이다. 200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복건성 서남부의 숭산준령에 분포되어 있는 독특한 건축 양식인 토루는 삼묘족의 후예라 불리는 객가인(외지인)들이 타민족이나 산적들로부터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토성 주택으로 주로 원형으로 되어 있으나 정방형이나 타원형의 형태도 더러 있다. 큰 규모의 토루 안에는 수십 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복건성 토루의 외양과 내부 전경

[상해/항주]

네 번째 중국 여행의 목적지는 2015년 1월에 다녀온 상해/항주였다. 교총에서 주선한 연수의 일환으로 주로 부부 동반인 단체 관광으로 다녀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자 중국 경제의 핵심인 상해는 불과 200년 전에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1978년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인구 2천만이 넘는 거대 도시로 도약하였다. 한때는 뉴욕과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금융 시장으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허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와 와이탄에서 바라본 상해의 야경

절강성의 성도이자 중국 8대 고도 중 하나인 항주는 한때 남송의 중심지였으며 경향 대운하의 끝에 있어 수로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다. 항주를 휘돌아 흐르는 전당강의 진흙과 모래를 막기 위해 인공으로 조성한 서호는 예술적 감성이 뛰어나 2011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상해에서는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둘러보고 동방명주에서의 전망과 황포강을 따라 이어지는 와이탄에서의 역대급 야경에 매료되었다. 항주에서는 세계 3대 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송성 가무쇼의 웅장한 스케일에 감탄을 연발하며 감상했다. 

항주 송성 가무쇼의 화려한 모습

[서안/낙양/정주]

다섯 번째 중국 여행은 2015년 10월에 있었던 연수의 일환으로 다녀온 중원의 서안/낙양/정주 세 곳이다. 중국의 현재는 북경에 있지만 중국의 과거는 서안에 있다는 말처럼 서안은 역대의 크고 작은 13개의 왕조가 수도로 삼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중국 영토의 한가운데인 중원에 자리 잡아 수많은 역사적 배경의 주무대가 되었던 서안은 아직도 발굴 중에 있는 진시황릉과 유서 깊은 역사박물관이 시선을 사로잡는 세계 4대 고도의 하나로 꼽힌다. 한때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이었던 서안의 화청지도 양귀비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는 온천으로 역사적 자취를 풍기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서안의 대안탑과 현장법사 동상 그리고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서안과 마찬가지로 낙양도 주나라에서 수도로 삼은 이래 9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역사적 고도이다. 후한 시대부터 당나라까지는 서안(장안)이 정치 행정의 도읍지였다면 낙양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도시였다. 중국 최대의 시인인 이백과 두보가 활동한 무대이자 동양 철학의 진수인 주자학이 발생한 곳도 바로 낙양이니 역사와 문화의 본향으로 그 자취를 오늘에까지 남기고 있다. 서안에서는 고속열차로 1시간 반이면 낙양에 갈 수 있으니 두 고도를 돌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낙양에는 불교 유적으로 유명한 용문 석굴과 관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관림이 유명하다. 

낙양 용문석굴의 원경과 근경

상(은)나라의 수도였던 정주는 서안이나 낙양과 마찬가지로 중국 8대 고도 중의 한 도시로 하남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중국 철도 교통의 심장부이다. 정주를 지나지 않는 철도는 없다고 할 정도로 교통의 요지라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신실크로드의 중국 기점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오랜 역사에 비해 정주에는 문화 유적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하남성 박물관에는 찬란했던 중원의 역사를 증명하는 13만 점의 유물들이 눈요기로는 충분했다. 

정주역 구내 대합실의 위용

[면산/태항산]

여섯 번째 중국 여행은 2016년 8월에 다녀온 면산과 태항산이다. 한식의 유래가 된 춘추 시대 진나라 문공의 신하였던 개자추의 전설이 담겨 있는 면산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협곡 지대의 절벽을 따라 사당과 사원이 별처럼 박혀 있는 절경의 공중 도시라 할 수 있다. 깎아지른 암벽에 높이가 110미터에 달하는 도교의 전당인 대라궁은 개자추가 꿈속에서 본 선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절벽에 생긴 자연 동굴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는 불교 사원인 운봉사와 불교의 성인 8명과 도교의 성인 4명의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는 정과사는 1,000년 전의 성인들이 가부좌를 튼 채 죽음을 맞이한 그대로의 등신불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면산의 하이라이트는 개공령 풍경구에 있는 개공사로 개자추를 기리는 사당인데 최대한 주변 자연을 살리며 동굴의 거대 바위를 다듬어 개자추의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면산의 개공사와 정과사

태항산은 태항산맥을 가리키는데 중국 중북부의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를 이루는 무려 400킬로 길이의 산맥으로 중국의 그랜드캐넌이라고도 한다. 해발 고도 1,000미터가 넘는 고봉준령들이 화북 평원에서부터 솟아 올라 남쪽으로 뻗어 있다. 산맥의 끝자락인 대협곡에는 여러 군데의 풍경구를 개발했는데 그중에서 면산에서 가까운 통천협을 다녀왔다. 가장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팔천협은 협곡을 흐르는 세 갈래의 지류가 여덟 갈래로 갈라져서 모이기를 반복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협곡 맨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은 속이 확 트일 정도로 후련한 풍경을 가져다준다. 유리판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아찔한 협곡의 낭떠러지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태항산 협곡 사이의 계곡과 폭포수

[마무리]

2006년부터 2016년까지 10년에 걸친 여섯 차례의 중국 여행을 통해 대륙의 13개 도시들을 돌아보았다. 북경에서부터 저 멀리 남쪽 하문까지 광활한 중국 대륙의 일부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견문을 넓히는 뜻있는 여행을 통해 과거의 중국과 오늘의 중국을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대륙의 중원에서 항구까지 수많은 왕조를 거치며 흥망성쇠를 이어 온 중화인들의 저력을 온몸으로 체험한 좋은 기회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자연의 웅장함에 매료되기도 하고 엄청난 사람들의 거대한 이동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 옛날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들의 무용담이 새삼 뇌리에 떠오르며 우리 민족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던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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