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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과 가로등

종교와 철학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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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 하나 서 있다. 국보 17호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팔각의 석등은 3단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까지 얹은 세련된 모습이다. 네 면의 화창(火窓) 사이에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무량수전과 3층 석탑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햇살을 받고 있는 석등은 이제는 그 옛날 뭇 대중들을 밝히던 등불은 아니지만 가람의 수호자인 양 우뚝 서 있는 자태가 참으로 의연하다. 온 도시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가로등과는 확연히 다른 풍광이다. 어둠을 밝히는 같은 등이라 해도 석등을 보면 사뭇 마음이 경건해진다. 우리 옛 조상들은 부처의 광명을 밝히고 중생을 인도하는 길잡이로 석등을 세웠으니 아마 가로등의 역사는 석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불국사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앞에 두 개의 석등이 남아 있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등불은 부처의 지혜를 뜻하며 이 등불이 켜질 때 중생의 어둠은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절 마당이 아무리 넓어도 석등은 하나만 세운다고 하는데 불국사에는 두 개의 석등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별개의 영역으로 본 것이라 한다. 불국사 석등은 네모난 창으로 보면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연화문과 석등, 대웅전, 본존불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신라인들의 부처님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기에 석등이 새삼 내 마음을 사로잡아 발길을 머물게 한다.

한편으로 태양에 대한 숭배는 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인 경외심이 드러난 의식이었을 것이다.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태양은 그야말로 인류 이전의 무한자적 존재이기에 현대인에게도 늘 광명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태양신 사상의 수많은 흐름 중의 하나가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 종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니 태양과 우리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가로등은 태양보다는 달에 가깝기는 해도 광명이세(光明理世)를 중시하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래도 태양 같이 밝은 가로등이 더 어울린다.

가로등은 가로수가 생기면서 보편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가로수가 우거진 신작로가 도회지에 만들어지면서 길을 밝히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등이 거리를 밝히면 가로등이 된다. 1,900년 어느 날 우리나라에도 최초로 종로에 가로등이 생겨 온 장안에 화제가 되고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해와 달의 자연광이 아닌 인조광으로 비추는 가로등이 신기할 때가 있었으니 세월이 참 무상하기도 하다. 곧게 뻗은 신작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서양의 지혜를 흠모하지는 않았을까.

박인환의 시구나 대중가요 가사에 나타난 가로등은 만남의 장이자 이별의 아픈 흔적을 간직한 추억의 매개물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봄날에 우산을 받쳐 들고 가로등 불빛 아래서 오붓한 상봉을 즐기는 청춘 남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함박눈이 솜처럼 내리는 가로등 아래에서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이별의 흐느낌에 울먹이는 두 연인은 환한 불빛이 오히려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인생살이의 온갖 희비가 불빛 아래 날마다 펼쳐지는 만화경의 세계가 바로 가로등이다.

오늘의 가로등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태양의 동반자가 되어 밤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가로등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요긴한 문명의 이기로 인류 역사 발전의 촉매제가 되어 왔다. 달빛의 낭만 어린 풍광을 대신하면서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창조해 낸 가로등의 역사는 불과 이백 년 남짓이다. 시골의 한적한 신작로에도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길 떠난 나그네를 지켜주는 듯하다.

부석사에 들러 고즈넉한 산사의 지킴이가 된 석등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이제는 아무도 석등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볼 수가 없다. 중생들의 무명을 걷어내려던 지혜의 불빛이 가로등으로 변해 버렸다. 무수한 가로등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해도 그 옛날 석등 하나가 밝히는 지혜의 가르침을 따를 수가 있으랴. 산사를 내려오며 내 마음에 조그마한 석등 하나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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