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를 찾아서

종교와 철학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9. 08:44

본문

나를 찾아 떠나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종교에 귀의하는 게 그 하나이고, 또 다른 방법은 명상이나 수련을 통한 마음 찾기가 아닌가 한다. 나를 찾는 지나간 여정들을 살펴보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을까 한다.

내가 처음 교회를 다닌 건 고등학교 삼학년 때였다. 동네 바로 인근에 조그마한 교회가 있었는데 친구에게 이끌려 고등부에 발을 들여놓았다. 일 년을 다니다가 성탄절 전야 행사를 끝으로 그만두었다. 딱히 집에서 믿는 종교는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일 년에 한두 번 절에 다니시니 반대가 없지는 않아 일요일마다 몰래 나가는 죄책감이 컸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니 기독교 세계를 알게 되었고, 어렴풋하게나마 절대자의 존재와 나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기지 않았나 한다.

기독교와의 인연은 별로 깊지 않았고 어머니께서 가끔 절에 다니시다 보니 주로 집안 분위기는 불교적이었다. 젊었을 때도 주로 불교 관련 책을 읽다 보니 불교적 사유에 익숙하였고 그밖에 성경도 얼마간 접했으니 종교적 편향은 별로 없는 편이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외우던 천도교 주문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잠시 집에서 동학에 다닌 것도 같다. 불교에 깊은 조예나 신심이 있는 게 아니어서 무아의 경지나 불성의 의미를 제대로 깨치지는 못했다.

십오륙 년 전에 단전호흡을 주로 지도하는 단학선원에 반년 정도 다녔다. 건강에 약간의 적신호가 켜져 입문을 하고 수련을 하였더니 평소 급하고 진득하지 못한 성격이 차분한 명상과 호흡으로 진정되는 듯했다. 현대인들이 갖기 쉬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는 단전호흡이 제격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단월드라고 하는 이 단체가 수련보다는 다른 데 뜻이 있는 것 같아 오래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옛 선인들의 호흡 수련이 제대로만 구현된다면 나를 찾는 여정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한다.

체중이 자꾸 늘어나고 혈압도 오르는 추세라 운동에 눈을 돌리다 요가를 시작한 게 그다음이었다. 이미 굳어지거나 비틀어진 관절과 근육들이 요가로 제자리를 찾아 체중도 줄고 허리도 가늘어졌다. 간단한 동작 같지만 몸과 마음이 함께 바로잡히는 요가의 매력에 빠져 삼 년쯤 다니다가 헬스를 시작하며 그만두었다. 인도적 사유를 바탕에 깔고 있는 요가는 의식과 대상의 몰입을 통한 삼매에 그 본질이 있다고 한다. 요가에 집중하며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경지는 나를 찾는 길의 좋은 이정표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나름대로 터득한 여러 가지 요가 동작들을 통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시간을 가진다.

첫 발령지에서 동료에게 이끌려 성당에 입문하여 세례까지 받고는 몇 년 다니다가 거의 이십여 년이나 냉담자로 머물다 연전에 다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중창단에 들어가서 활동하다 보니 다들 같은 성당 성가대원이라 그 성당에 다시 다니게 되었다. 사실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조금 심란하던 차라 자연스럽게 돌아온 탕자 마냥 다시 가톨릭 신자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과거의 맹목적인 신앙심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언가 새로운 믿음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어떤 거대한 기운이나 힘 같은 게 있다면 그게 창조주의 성스러운 작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물주의 창조로 생명을 얻은 피조물로서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신심의 돈독함이 생기는 것 같다. 불교적 사유로 깨우쳐 본다면 자아는 무상한 존재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새로운 약속으로서의 기독교에서는 나의 가치는 낮은 곳에서 꼴찌가 됨으로써 행복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하며, 우리나라의 자생 종교로 지금은 많이 위축된 천도교에서는 나의 존재 가치를 절대자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려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평등과 박애 정신을 종교적 신념으로 자리 잡게 하고 있다.

사실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하나를 선택해서 대답하기가 그래서 한때는 기천불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이라면 유불선이 있듯이 오늘날 종교의 세 기둥인 기독교와 천주교 그리고 불교가 알게 모르게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 외에도 도산서원 수련회에서 퇴계 선생의 일대기와 저서들을 통해 본받을 점을 깨우치기도 했고, 인내천을 부르짖으며 하늘을 섬기듯이 사람을 대하라는 동학의 가르침도 어느 정도는 나를 찾는 여정에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양한 기성 종교들이 추구하는 신앙적 지향의 끝을 따라가 보면 아마도 대부분 비슷한 경지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는 유한한 우리들에게 나를 찾는 방편으로서의 종교와 수련은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유학이든 제대로 길을 찾아간다면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나를 있게 한 절대적 존재의 힘이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한울님이나 천지신명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따른다면 천명에 따르는 겸손함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는 따스함도 함께 우러나 행복한 천국이 바로 내 안에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종교와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운과 동학 그리고 용담정  (0) 2020.08.09
갓바위  (0) 2020.08.08
사주와 운명  (0) 2020.08.08
석등과 가로등  (0) 2020.08.08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