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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마당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1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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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의 요소를 흙과 공기와 물과 불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지(地), 풍(風), 수(水), 화(火)에 해당된다. 서양의 정령(精靈)과 동양의 사신(四神)이 공간을 넘어 함께하는 것이다. 대지의 정령은 현무와 통하고, 바람의 정령은 백호라 하고, 물의 정령은 청룡이며, 불의 정령은 주작이라 부른다. 이처럼 바람은 만물의 기운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존재이다.

바람은 세상의 처음과 함께 한 존재이기에 자연의 오묘한 섭리가 담겨 있다. 노자에 천지는 불인(不仁)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연은 무정하고 인지상정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바람이 바로 그러하다. 바람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운을 제공하지만, 가끔은 세찬 폭풍우를 몰아쳐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바람뿐 아니라 나머지 세 원소도 불인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할진대 사람이 자연을 닮아가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사물을 직시하는 태도가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기본이기에 바람의 비어있음을 본받아 부지런히 나를 비워야 하리라.

바람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늘 체감한다. 대학 졸업 여행으로 간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으로 가는 마지막 좁은 등성이에 얼마나 바람이 세차게 불던지 잘못하면 저 멀리 바닷속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봄날에 부는 바람은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지만, 눈보라 휘몰아치는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은 가슴을 얼어붙게 만든다. 짝이 없어 외로움을 타는 이에게 부는 가을바람은 스산하기 그지없어 처연한 슬픔을 더욱 부채질하고, 한여름 태풍이 몰고 오는 비바람은 세상을 뒤흔들며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흔히 바람이 지닌 이중적 의미는 삶의 양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맑은 기운을 퍼뜨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흥겨운 바람은 풍부하고 멋진 삶을 가져오지만, 통풍(痛風)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바람 잘 날 없다는 말도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고 바람피운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다. 떠돌이 역마살에다가 도화살까지 함께 붙어 있는 바람이라면 아마 순탄한 인생살이는 거의 힘들 것이다. 바람맞는 일도 자주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을까.

예로부터 풍수(風水)라는 말이 있듯이 바람은 우리 삶의 근원을 형성하는 기운이다. 당대에 살기 좋고 후손에게도 복을 내리는 터는 바람이 잘 통하면서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말은 결국 물과 바람이 조화를 이루어야 명당이 된다는 것이다. 물을 잘 다스리고 바람을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 곧 사람살이의 기본이다. 하물며 집 안의 화초도 잘 키우려면 바람과 물의 조절이 거의 절대적인 조건이 아닌가. 나이가 들어가니 아무데서나 막 살기가 더욱 두려워진다. 정년을 마치고 어디 풍수 좋은 데 한옥 한 채 짓고 살 수 있다면 여한이 없으리라.

한때 북풍이니 총풍이니 하면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바람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선거 때는 더욱 바람이 기승을 부린다. 참여정부는 노풍이 일으킨 바람으로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분위기는 소위 바람이라는 풍향이 어디를 지향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치맛바람이 극성을 부리면 교육은 제자리를 잃어버리고, 춤바람이 사교계를 휩쓸면 가정이 무너진다. 어딜 가나 무슨 풍(風) 자류가 그리 많은지 요새는 온통 바람의 천국이다. 한류(韓流)가 세계를 휩쓸다가 이제는 역으로 한풍(漢風)이 분다고 한다. 너도나도 중국어 열풍이 일어난다.

요즈음에는 과연 무슨 바람이 불고 있을까? 아마도 가장 힘센 바람은 학원 바람이 아닐까? 너나 할 것 없이 학생들은 적어도 한두 가지 사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우리나라 교육은 학력 과잉의 폐해가 심각한 편인데도 누구나 형편이 안 되어도 대학을 보내려 한다. 한해 대학 졸업생은 반도 취업이 안 되는데 스무 살 되는 청소년 중에 80% 이상이 대학생이다. 이제는 제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희망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자기만의 독자적인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율형 인재를 키우는 것이 시급한데도 학원가의 불은 환하기만 하다. 바람직한 것보다는 바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좋은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율 바람은 언제 불 것인가?

그래도 삶의 활력소는 바람이 불러일으킨다. 녹색 바람이 불어 생태 환경이 살아나고, 웰빙 바람으로 모두가 건강한 삶을 누린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바람이 없을 것이다. 내 몸속의 탁한 공기도 탁 트인 대지에 서서 맑은 새바람으로 채워 넣는다면 한결 가뿐해질 것이다. 온 동네가 수필 바람으로 들썩인다면 수필 쓰는 맛도 제법 고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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