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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마당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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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초가을의 맑은 하늘 사이로 언뜻언뜻 솔향기가 코를 적시는 날, 이번 답사의 주인공인 육사 시인의 고향 안동을 생각해 본다. 안동은 육사의 향기를 곳곳에 간직하고 있는 시의 도시이기에 해마다 '이육사 문학 축전’이 열리고 있으며, 이육사 문학관에서도 다양한 행사를 통해 육사의 문학과 생애를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동에서는 하회 탈춤만큼이나 육사의 발자취도 우리에게 많은 역사와 문화의 산 경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원하게 뚫려 있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인터체인지로 나오면 탑으로 이름이 지어진 조탑 마을이 나온다. 아직도 몇 개의 전탑들이 남아있는데 안동에서만 볼 수 있는 탑이기에 더욱 발길을 머물게 한다. 좀 더 올라와서 측백나무 자생지가 있는 암산 유원지를 멀리서 바라보며 일직에서 안동시로 넘어오는 4차선 국도를 따라 넘어오면, 낙동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지고, 한눈에 담을 듯한 소도시의 전경이 손님을 맞는다.

웅장한 안동댐 바로 밑에 넓은 광장과 주차장이 있고, 그 옆 언덕길에는 댐으로 수몰되기 전의 전통 가옥들을 옮겨 놓은 민속촌과 야외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입구에 장승과 육사의 광야 시비가 서 있다. 육사의 광야 시비는 원래 1968년 시내 남쪽 낙동강 도로변에 세워 놓았다가 1978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는데, 시비에는 육사의 대표작인 ‘광야’가 새겨져 있다. 이 육사 시비가 서 있는 언덕길 너머 마을에는 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장이 있기에 역사의 향기를 한층 더 느끼게 한다.

낙동강 굽이굽이 흐르는 강변에서 한낱 시비로 남아 아직도 못다 한 독립의 노래를 가슴으로 토해내는 육성이 들릴 듯한 이 곳에 홀로 서 있자니 온갖 회한이 뇌리를 스친다. 저 멀리 보이는 신세동 전탑의 신세처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다시금 온몸을 전율케 하고, 독립을 앞두고 이국 만리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한 육사의 투혼에 옷깃을 여민다.

안동시 태화동에 있는 육사의 생가는 원래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의 조성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속칭 월남골로 이건하였다. 생가의 실제 주인은 육사의 먼 친척으로 개인 소유다 보니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한낱 도시의 한 귀퉁이에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전통 가옥으로 ㅁ자형의 양반집이었을 육사의 생가는 이건하면서 제대로 돌보지 않아 늘 대문은 잠겨 있고, 좁은 마당 안에 서 있는 안내판이 겨우 이 곳이 육사의 생가임을 알게 해 준다. 이제는 원래의 생가터에 시비와 유허비가 새로 세워져 있기에, 이 곳 생가를 다시 도산면 원촌리로 옮겨서 육사의 넋을 달래며 독립을 향한 그의 민족혼을 추모하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경북 북부 지방에는 의외로 문인들의 생가가 더러 있다. 영양의 일월 주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가 아직도 그 전통 가옥의 면모를 자랑하며 건재해 있고, 영양읍 남쪽에는 오일도 시인의 생가가 그 옛날 만석꾼의 위용을 뽐내며 반변천 휘돌아 가는 감천리에 시비와 함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육사의 생가는 너무나 초라하게 남아 있어 다시금 허전함을 감출 수 없기에 월남골의 좁은 골목길에 붙어 서서 한참을 지붕만 바라보다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안동에서 도산 서원 앞을 지나는 굽이 잦은 35번 국도를 따라가다 도산면사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포장된 마을길로 접어들면, 고향처럼 아늑한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야트막한 야산과 그 가운데로 흐르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개울, 드문드문 옛 기와집이 있는 농촌 마을에는 한낮의 한가로움이 배어 있어 절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퇴계 종택 앞을 지나는 개울인 토계는 마을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좌우에 논과 밭을 만들어 놓았다. 육사의 시어처럼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릴 것 같은 당산나무와 당집 앞을 지나서 퇴계 선생의 묘소를 오른쪽에 두고 한 구비 작은 고개를 넘으면 멀리 낙동강 구비와 왕모산의 정기가 서려 있는 육사의 고향인 원촌리가 내려다보인다.

육사의 고향인 도산면 원촌리는 멀리 왕모산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말굽처럼 휘돌아나가는 낙동강이 마을 앞을 흐르는 풍수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왕모산성은 고려 공민왕이 이 곳 도산으로 몽진을 왔을 때 왕의 어머니를 피신시킨 곳으로 유명한데, 한쪽은 천혜의 절벽으로 거의 수직으로 서 있는 단애가 가로막혀있고, 나머지는 성으로 둘러싼 유서 깊은 산성이다. 아직도 왕모산 중턱에는 두 개의 목각인형을 모셔 놓은 왕모당이 남아 있어, 공민왕과 왕의 어머니를 추모하는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그 옛날 퇴계 선생께서도 단걸음에 오르셨다는 갈선대 바위도 왕모산의 풍광을 짐작하게 한다.

아! 누군가 인재는 하늘이 낸다고 했던가. 자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에게서 하늘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이 아닐까? 산수가 수려하고 단아한 풍광 속에서 자란 퇴계 선생과 육사 시인은 그래서 하늘이 낸 위인인가 보다. 도시의 삭막한 골목길에서 자라 난 일개 범부로서는 감히 넘어다 볼 수 없는 인품과 기개를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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