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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물벼락

에세이 마당

by 전하진(全夏辰) 2020. 8. 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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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로터리를 지나갈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제재소가 아버지의 일터였다. 칠성교 건너로 이사 오기 전까지 제재소 아래채에서 살기도 했으니 동인 로터리는 추억의 네거리다.

로터리 제재소에서 지내다 대현동으로 이사 온 집에 아버지는 가마솥 아궁이를 만들었다. 여느 도회지 가정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아궁이에는 늘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다. 제재소에서 남는 땔감들로 한 겨울에도 훈훈하게 지냈다. 아버지의 손길이 아랫목에 녹아들어 따뜻한 훈기가 감돌았다. 이층 다락방에서도 온기가 느껴져 자주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해방 전에는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노역으로 죽을 고생을 하였고, 해방 후에 돌아온 고향에는 자갈밭 한 평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틈틈이 보내 준 돈을 큰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다 날려 버렸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일가 할아버지네 중국집 일이었고, 그 후로 집 장사일을 도와주다가 할아버지가 제재소를 시작하자 공장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거의 3천 평이 넘는 제재소에는 큰 통나무를 옮기는 기차 레일도 깔려 있었다.

6.25 전쟁 때 아버지는 20대의 나이로 강제 징집되어 탄약을 나르는 등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아남았다.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아버지는 늘 힘든 노역의 밑바닥을 맴돌았다. 그러기에 어머니를 만나고 우리 삼 남매를 키우면서 삶의 가장 큰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온갖 궂은일은 다 하면서 한 집안을 일구었다. 말은 별로 없지만 자식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올 때면 손에 늘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비산동의 큰 교회당 앞집이었다. 그때까지도 부모님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내 호적상 생일은 원래보다 한참 늦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중매로 만나면서 나이를 속였다. 아마 제대로 나이를 알렸더라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11살의 차이를 어머니는 참고 견뎠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작달막한 키에 인물도 별로 없었지만 마음만은 비단 같았다. 소위 법 없이도 살 분이었다. 아마 어머니가 마음을 다잡은 것도 아버지의 어진 성품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남을 너무 믿는 성격이 결국은 화를 자초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쯤 동인동 제재소를 그만두고 동업자와 함께 다른 제재소를 세웠으나, 얼마 가지 못해 동업자의 배신으로 다 탕진하고 빚만 남았다. 가끔 아버지를 따라 수금하러 다니기도 했지만 그 길로 제재소는 망하고 말았다. 살던 집도 부채에 넘어가고 세를 얻어 사는 형편이 되었다. 좀 더 집안을 키워보겠다는 마음에 시작한 사업이 실패로 끝나 살림이 옹색해지자 아버지는 포장마차를 끌고 나갔다. 어머니도 그 무렵 시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식당 일까지 하러 다녔다.

가세가 기울어지자 바로 아래 남동생과 언쟁이 잦아졌다. 네 살 터울이라 차이가 많은데도 제 주장이 강한 아이라 힘들었다.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면서 자주 말썽이 났다. 어릴 때부터 간혹 엉뚱한 데가 있어 순종적인 나보다는 제 앞가림은 하는 애인지라 성격 차이도 사단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맏이가 되어 너그럽게 대하지 못했던 게 후회가 된다.

그날도 사소한 일로 동생과 다투었다. 낮에 부모님이 안 계시니 자연 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장만하는 동안 청소를 좀 하라고 했더니 시큰둥하게 반응이 없었다. 몇 번 잔소리가 이어지고 옥신각신 언성이 높아지더니 급기야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방 안에서 시작된 다툼은 방문을 박차고 마당까지 이어졌다. 그 와중에 방문 한 짝이 박살이 났다. 큰일이었다. 이제 곧 아버지가 들어오실 텐데 이를 어쩌나. 사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겁이 났다. 늘 우리 삼 남매를 키우며 매를 드신 건 어머니였으니까.

그래도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동생하고 싸우다가 생긴 불상사라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마음을 졸이며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던 분이었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서 둘 다 밖으로 나가!”

나와 동생은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마당으로 내려갔다. 어떤 벌이 내려질지 눈만 크게 뜨고 마당에 서 있는 우리 두 형제에게 아버지는 고함을 쳤다.

“마당에 엎드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때까지 아버지에게 단 한 차례도 매를 맞은 적이 없었는데 기어이 오늘은 매를 맞는구나. 눈을 질끈 감고 마당에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온몸에 찬 물이 쏟아진다. 아버지는 그리도 사랑스러운 우리 두 형제에게 도저히 매를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돗가 웅덩이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물벼락을 내리고 있었다. 오뉴월 더위에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한 물벼락을 맞으며 나는 속으로 엉엉 울었다. 질곡의 세월을 넘어온 아버지의 숱한 고난의 흔적이 한 줄기 물벼락이 되어 내 등을 아프게 내리찍고 있었다. 한 마디 꾸중보다 한 대의 매보다 더 아픈 물벼락에 나와 내 동생은 한참을 엎드려 흐느꼈다.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느낀 그 날의 물벼락은 내 평생의 가르침으로 남아 내 아이에게도 그대로 물려주고 있다. 우리 두 형제도 물벼락 사건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을 정도로 우애가 깊다. 마지막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해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짐을 만들어 놓고 가신 아버지의 물벼락은 폭염의 하늘 아래 한 줄기 폭포수가 되어 아직도 내 마음을 흠뻑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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